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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해자와 피해자, 그 외의 방관자
    일상다반사 2018. 8. 2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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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d

     

     

    왕따가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되면서, 일진과 왕따, 두개의 극단적인 부류로 한 움큼의 사람들을 구분 짓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에 보면, 일진은 그만의 성장과정에서의 정서적인 아픔이 있고, 왕따 또한 그만의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가해자피해자라는 관계로 정의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때에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꼭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아니고, 아픈 사람이라고 꼭 울고만 사는 것은 아닌 법이다.

     

    성희롱예방교육을 회사에서 의무적으로 실시하면서, 팀 교육 담당자로서 동료들에게 어떻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를 참 많이 고민했었다. 가해자들은 묘한 행동의 패턴을 가진다. 손이나 팔을 터치해보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하네, 싶으면 허벅지를 만져보고, 또 아무도 뭐라고 안 하면, 다른 곳을 시도해보고 심지어 폭행이라고 하는 행동들을 야금야금 수위를 높여가면서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는 묵인이라는 큰 조력자가 동기부여를 하게 되고, 그런 묵인의 행위자는 보통 제3, 즉 방관자가 된다. 방관자는 지위와 신분을 불문하고, 그 단 한번의 방관적 제스처로, 그리고 그러한 방관자들의 집합으로 한 명의 범죄자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한다.

     

    세상의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런 결과를 막을 수 있는 수많은 우연을 무심코 비켜나가는 사람들 또한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오래전 직장에서 보고 받은 사건이 있었다. 어떤 지방 지점에서 중간관리자가 신입사원 교육과 단합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구타를 하는 일이 있었다. 그 지점에서는 상당기간 이어져 온 일이었다고 한다. 본사에 보고가 되었을 때 그 구타사건의 피해자가 신입사원 한명으로 특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인사팀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이런 사건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보호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향후 지속적인 근무를 희망할 경우를 감안하여 가해자에 대한 처벌 여부에 대하여 피해자의 의견을 물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피해자는 당해 가해자와 선후배 사이로 지속적으로 근무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처벌을 불원한 상태였다. 이에 사장님은 생각이 다르셨다.

    제가 보호해야 하는 피해자는 그 신입사원 한명이 아닙니다. 우리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상 모든 직원들의 안전과 그들의 근무환경을 지켜주는 것은 나의 직무이자 책임입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 벌어져서는 안된다고 정확하게 인지 시켜야 합니다. 피해자의 희망여부와 관계 없이 그 가해자에게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

    사장님은 그 지점을 방문하셨을 때 직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대표이사로서 직무를 다 하지 못한 점을 허리 숙여 사과하셨다.

     

    전 직장은 성희롱예방교육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동시에 각 부서에 성희롱예방지킴이를 지정하였다. 보통 동 부서의 부서장을 제외한 인원 중 여성 최고 직급자를 지정하였다.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증권회사에서 당해 부서 고 직급자가 되기 까지 버텨낸 언니들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라는 웃픈 공감대도 있었다. 이런 조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마치 사고를 당했을 때 누가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기 안경쓰신 남자분, 구급차 좀 불러주세요라고 해야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성희롱예방지킴이는 모두가 방관자인 상황을 모면하기 아주 좋은 솔루션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성희롱이나 학교폭력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직장내 괴롭힘이나 괴롭힘이라고 까지 이름 붙이기 어려운 불편한 상황들에서 수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한다. 적극적인 가해자나 동조자가 아니더라도 방관자가 아닌 관심을 보이는 참여자가 되어 위로를 전하거나 경고를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이른 시간에 발생이 된다면 정말 많은 큰 상황들을 피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두렵다. 협조자가 되었을 때 자칫하면 피해자 2가 될 수도 있을까봐 사람은 두려워한다. 중국 언론에서 어떤 사람이 구타를 당하고 있는데, 빙 둘러싸서 보기만 할 뿐 그 누구도 나서 주지 않는다는 보도를 수차례 봤다. 혹여 그 가해자가 나에게 해코지 하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위험을 감수하면서 라도 남을 도와주는 그런 정의로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얼마 전 남편과 동내에서 산책을 하던 중에 어떤 어두운 골목 안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가까이 가 보니 어떤 20대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질질 끌고 골목 밖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남편은 다가가 저지를 했고 나는 여자를 보호하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여성경찰이 동반한 팀이 신속히 나타났고, 우리는 경찰에게 그 상황을 넘기고 자리를 떴다. 남편보다 족히 20센치는 키가 더 큰 남자였다. 나는 남편에게 혹시 주취자인지 물어 봤더니 술냄새는 나지 않는데 횡설수설 하는 것이 약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앞뒤 사정 생각 없이 사람부터 구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목격한 사람이 딸아이라면 내가 딸아이에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니 위험한 것 따위는 극복해야 한다고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세상은 나쁜놈 몇 명이 아닌 무관심한 다수 인에 의하여 돌아간다. 우리는 도덕이나 정의감 같은 이름으로 나쁜 일을 방관하지 말고 나설수 있을 것을 독려한다. 하지만 비난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비난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가해행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상당히 구체적인 언어로 아이의 구체적인 행위를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순간, 나는 칭찬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그러한 행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자제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도덕이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누군가를 강요하기도 한다.

     

    가정은 아이를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가르쳐서 사회에 내놓을 책임이 있다. 그리고 피해자가 되었을 때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도 가르쳐야 한다. 최대한 방관자가 되지 않고 도덕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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