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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인의 사랑
사윤이를 가지고서 추리소설을 잠깐 끊고 “인도인의 사랑”이라는 책에 몰입한 적이 있다. 짧고도 긴 인도인의 사랑이야기를 몇개 담은 그 책은 나에게 더 큰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고 또 다른 “사랑”, 그리고 또 다른 정서와 가슴의 크기를 보여주면서 나에게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렇게 나는 나와 다른,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만 너무 아련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여행이란 이렇게 독서 만큼이나 나의 세상을 넓혀주고 나의 가슴을 넓혀주는 일인 것 같다.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때 삼다삼무(三多三無)를 처음 들었다. 삼다는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는 얘기라고 한다. 삼무는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고 대문이 없다는 것이고. 사윤이가 왜 여기는 여자가 많은 동내인지 물어본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예전에는 어부들이 안전하지 못한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다 보니 많이 죽어서 여자가 많은 동내가 되었다고 얄팍하고 원론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사윤이가 묻는다.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 하냐고. 왜 그렇게 죽어 가냐고. 우리가 한살 한살 먹어가면서 꿈을 야금야금 씹어 먹어가면서 나날이 늘어나는 것이 이런 부질 없는 듯 하면서도 족쇄같은 “책임”인 것 같다. 가장이니까, 내 가족을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위험 따위는 애교일 수 밖에 없는 그런 현실. 사윤이에게 그냥,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열심히 회사도 다니고 노력하는거랑 똑같은거야, 옛날의 제주도는 물고기를 잡는 거 말고는 노력할 방법이 많지 않았을 것이야… 라고, 또한 원론적인 사랑이야기로 설명을 해주었다.
서글픈 어민들의 “삼다”속에, 어진 “삼무”를 갖고 긴 세월을 살아온 이 곳, 척박한 땅에서 생존과 존재의 모든 방법과 의미를 찾아낸 그들의 모습이 아닐까, 여행지에서 “인도인의 사랑”과 같은 또 다른 정서와 감동을, 제주도를 처음 밟고 제주도의 체취를 이렇게 처음 느꼈다. 이렇게 제주도는 나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2. 일반인의 히말라야, 한라산.
요즘, 유난히 제주도를 많이 온다. 일년의 출발은 눈이 덮인 한라산을 밟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습관이 순간 생긴 듯 하다. 그만큼 한라산은 매혹적이고 또 정서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인연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만큼, 한라산을 찾게 될 때마다 좋은 일이 한가지씩 꼭 있게 되나 보니 늦은 시간까지의 음주와 그 후의 등반이 이상하게 쌍을 지어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체력도, 술도, 장비도, 한라산에 오르기에는 아무 문제가 아니다. 우아, 어떻게 이런 모습이 있지…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인 것이 한라산이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어려운 산이라고 하나, 나는 심심하고 답답한 산이 어려운 산이지, 높지만 아름답고 높지만 재미 있는 한라산은 어려운 산일 수가 없다.
최근에 오랜 심심풀이 꺼리도 하나 만들었다. 6인 1조의 등반이었고 우리는 중간 대피소에서 먹을 라면과 김밥을 기대하며 꾸역꾸역 장만해서 등산로에 올랐다. 전날의 숙취와 애매한 우리의 시간 계획 때문에 우리 중 4명은 단 몇 분의 차이로 대피소 통과를 놓쳐버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중, 체력이 좋은 2인은 씩씩하게 우리를 놓고 정상으로 향했다. 그냥 돌아갈까? 우리는 대피소에 가서 김밥이라도 한 줄 먹고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에 의견을 모으며 그 늦은 5분을 떠안고 대피소까지 꾸역꾸역 향했다. 대피소로 올라갔을 때 우리는 그야말로 “맨붕”이었다. 앞서간 그 두 명이 우리의 김밥과 라면을 모두 가방에 넣고 정상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한라산은 역시 높은 산이다. 대피소의 위치에서도 우리의 장비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추위가 느껴졌다. 그만큼 우리가 안일하게, 땀도 흘리지 않은 채 편하게 올라왔다는 부끄러운 이야기 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그냥 하산 길에 들어섰고, 그 두 명에 대한 지겨운 김밥 농담과 소심한 복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한라산에 대한 동경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스로와의 대화를 유발하는 어려운 산이라는 점, 그리고 드라마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한라산의 모습, 그리고(내가 이상한 건가…) 기상천외한 한라산의 하루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교태 많은 여인 마냥, 나에게는 매혹적이었다. 첫 한라산 등반을 하던 날, 오름 길에서는 파아란 하늘과 눈부신 눈 등성이와 나무에 맺힌 눈얼음의 조화에 감탄하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지만, 하산길에서는 매서운 눈바람 속에서 “산악인”같은 사진 한 장 운 좋게 건질 수 있는, 변덕스러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한라산에 빠져버렸다.
섭지코지와 민속마을을 돌았던 첫인상 때문에 친구와 아무 계획 없이 제주도로 떴었다면, 한라산은 최소한 일년에 한번 이라는 계획을 나에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 잡지를 읽다가 “한라산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글이 있어서 펼쳐보고 크게 감탄했다. 왠지 서양에서나 만들어낼 법한 건조하면서도 깔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포스팅이었다. 여기서 가볍게 공유해 본다. 진짜로 “한라산의 거의 모든 것”이다.
3. 아련한 나의 꿈, 올레길
제주도 하면 올레길이다. 유럽의 여행지를 다녀온 서경숙 작가님이 나의 아름다운 고향 제주도에도 이런 아름다운 길이 있어 사람들이 쉬어 가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만들었다고 한다. 제주도와 걷기가 모두 취미인 나에게는, “탐구생활”이라는 만화에서 처음 알게 된 올레길을 바로 열광할 수 밖에 없어졌다. 나는 요즘도 알게 모르게 우리 딸들에게 걷는 연습을 많이 시킨다. 그냥 나의 이런 즐거운 취미생활의 동무가 되 줬으면 하는 사심 때문이다. 그 중에 삼다, 삼무와 연관된 아련한 이야기를 하나 알게 되었다. “올레길”이란 본디 큰길에서 내 집으로 접어들기 위한 골목길을 이야기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도의 “올레길”이라는 단어는 골목길과 아주 많이 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의 삼다의 대표가 “바람”이라고 하였다. 큰길에서 우리 집으로 곧게 길이 뚫려 있으면 그 바람 또한 바로 우리 집으로 와서 우리 집의 종이 창틀을 부시고 나무 문틀을 부실 것이었기에 “올레길”은 본디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 한번 척박함 속의 그들의 지혜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올레길은 제주도의 꼬불꼬불한 작은 보행길을 뜻하고 나처럼 제주도를 갈망하고 여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산책하며 조용히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조용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비밀의 공간 같은 곳이다.
나는 섣불리 올레길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서지 못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나는 실현되지 못한 나의 꿈을 되 뇌이며 어느 여유 있는 날 또는 어느 숨막히는 날, 2주 또는 더 긴 휴가를 스스로에게 주고 하루에 한 코스씩 조용히 산책하고 맛집을 찾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으며 그렇게 반듯이 하고야 말 일정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제주도라는 아름다운 동내는 오롯이 천천히 걸으며 천천히 구석구석 다 느껴야 할 것 같은 동내다. 이루지 못한 꿈의 아련함이 상상 속의 제주도와 상상 속의 올레길을 크게 더 크게 만들어 준다.
4. 제주도 식도락
전라도의 음식문화가 발달 된 것은 다른 지역 대비 풍요로운 오랜 농경 시대를 살았고 귀족들이 번창 하면서 긴 시간 누적되고 발전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음식 문화 역시 지역별로 다르고 오랜 시간 농경의 가장 풍요로운 지대였던 장강 지역이 가장 발달되어 있다. 대만의 음식이 아주 훌륭하고 간식의 종류도 아주 풍부한 것은, 중국에서 “전통 귀족”으로 살고 있던 풍요롭고 고급진 음식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제주도의 음식문화가 이토록 번창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육식동물이라고 주장할 만큼 삽겹살을 좋아한다. 돼지비계를 좀 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주도 흑돼지의 비계는 쫀득함부터 다르다. 제주도 흑돼지는 원래 제주도 토종 돼지로서 생육이 느려 잡아먹기 까지 일반 돼지 보다 2~2.5배 정도의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물론, 생육이 빠른 효율적인 고기 생산을 위하여 제주도 내에도 순수 혈통의 흑돼지는 이미 많지 않다고 한다. 본연의 기후적 특성이 만들어 낸 본연의 풍물이 제주도 음식문화의 하나의 출발인 것인가.
비싸디 비싼 명동의 흑돈가를 다니다가 명동에 흑돼지 맛집이 여러 곳 생기면서 여기저기 누비고 다니던 나이기에 제주도 맛집의 단연 일등은 당연히 흑돼지 구이다.
제주도 본연의 음식문화라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회일 것이다. 물질하는 해녀들로부터 받아먹는 막 자른 멍게, 해삼, 다른 동내에서 맛보지 못하는 쫀득하고 두툼한 회, 그리고 죽은 생선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고등어회까지. 나같은 회와 친하지 않은 육식동물에게 고등어 회는 하나의 신선한 문화 충격이었다. 매콤, 새콤, 상콤한 야채 묻힘에 잘 고소한 김에, 들깨와 참기름과 간이 된 맛있는 밥이 같이 나오는데 이 조합을 한번 싸서 한입 가득 쏙 집어 넣으면, 세상 행복이란 별거 없구나 싶을 만큼 상콤하고 맛있다. 고등어의 살이 전혀 비리지 않게 쫀득하면서 기름이 살짝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소함을 준다.
여기에서 더 놀라운 것은, 회와 함께 나오는 고등어 탕이다. 촌스러운 육지사람인 나는 고등어는 구이와 조림만으로만 먹어봐서 고등어탕에 대한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한 입 뜨는 순간, 감동이 몰려오는 맛이다. 걸쭉한 들깨국에 야채와 고등어 뼈대가 어우러져 있고 적당한 간까지 더해져, 개운하면서 고소하고 깔끔하다. 내가 아는 세상이 참 이렇게도 한 움큼 밖에 안되는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제주도 하면 한라산 소주인 줄 알았다. 소주의 공예와 맛이 묘미는 잘 모르겠지만 한라산 특유의 깔끔하고 상큼한 알콜 향기가 있기에 많이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제주도 막걸리에 한번 더 놀란다. 막걸리의 맛, 하면 서울 장수막걸리가 제일 맛있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깔끔하고 덜 달면서 깊은 숙성의 맛과 입안에 남아 있는 끝 맛까지, 너무 훌륭한 막걸리다.이렇게 마시다 보니, 아침 해장국 또한 요긴 해진다. 몸국, 고기국수, 고등어가 들어간 배추해장국…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이 입에서 살살 녹아나다 보니 제주도에서는 도무지 배가 고플 틈이 없다.
그 와중에 제주 감귤, 한라봉, 천혜향, 제주도에 왔다 하면 일단 차에 실어놓고 줄기차게 까먹게 되는 과일도 있고 또 오셜록에 들려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고 따끈한 녹차라떼로 달달한 기운을 한껏 보충한다.
남들이 없는 것을 품어 내는 제주이고, 남들이 있는 것 마저도 더 맛있게 담아내는 제주는, 기후도 땅도 물도 그야말로 보물이다.
제주도는 오랜 시간 외부의 발길 없이, 척박한 섬마을로 살았었다고 한다. 옛날 옛날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섬을 벗어나는 것이 꿈이었던 그런 삶을 살았었다고 한다. 이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던 것일까. 수렵, 농경, 산업화, 문화생활의 보편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어떤 시기에 이 원래부터 아름다운 동내에, 만족과 풍요와 행복이 깃들기 시작한 것일까
제주가 뜨거운 관광지가 되고 나서, 중국인 무비자까지 허용하면서 땅값이 무섭게 치솟고 지역경제가 번창하는 모습을 짧은 시간 내에 거창하게 보여주었다. 내가 익숙했던 애월 해안만 해도, 브랜드 별로 카페가 다 들어가 있고 구석구석 새로 지은 또는 새로 짓고 있는 예술품 같은 팬션들이다. 웬지 서글프다. 언젠가 신문에서 “피폐해진 제주인의 삶”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땅을 가진 자들은 치솟는 땅값으로 부를 쌓아가고 있겠지만, 제주도의 젊은이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을 사지 못할 만큼, 삶의 질과 앞날이 훼손되고 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숨만 쉬고 살아도 내 고향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하는 갑갑함 같은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급여로, 관관객에 맞춰 치솟은 물가와 부동산 가격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 오래 사신 아주버님은 제주도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자연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는, 순박함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는 그런 제주를 마음에 품고 싶은 것은 그냥 나, 한 이방인의 욕심일 수도 있다. 지역경제의 발전이 그 동내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긴 시간 동안의 행복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하게 될런지, 짧디 짧은 정치적 주기만을 가지고 긴 긴 지역주민들의 앞날을 피폐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닌 겅정이다.
오늘 아무 예고 없이 좋아하는 선배님 댁에 마구 달려들어 커피 한잔 얻어 먹고, 한라봉 싸들고, 그 선배님이 좋아하는 잡지 한권 잡아들었다. 바로 그, “한라산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잡지. 나는 진지하고 따뜻하면서 쉽고 편안한 글을 너무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글이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탐방하고 물어보고 느껴보고, 그러고 나서 쉽고 즐겁게 써 내기란 게으른 나에게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래서 인지, 더 욕심이 생긴다. 제주도라는 곳에 대하여. 하민주 편집장님의 편집 그리고 그 팀의 작업 덕분에 제주도의 구석구석에 대하여 이렇게 조근조근 제주도 사람들의 정서와 행복을 담아 읽어볼 수 있는 점에 대하여 감동하면서, 나도 그렇게 내 발로 알아보고 싶고 내 말로 담고 싶은 욕심이 마구마구 생긴다.
나에게 제주도는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친해지고 싶은 순수하면서도 원숙미가 풍겨나는 그런 여인처럼 느껴진다. 성숙되고 요염하지 않은, 패션도 아주 적정하고 맨트도 너무 적정하며 미소마저 너무너무 적정한 그런 매력적인 여인같은 존재이다. 세상 복잡해질 만한 내 상황에 이렇게 나의 관심을 끌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 너무너무 고마울 뿐이다.
제주도를 다 걷고 싶은, 팬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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