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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엄마는 어떻게 나를 수재로 만드셨을까(2)
    일상다반사 2014. 4. 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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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에 간 후에, 북경대 수석입학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알바꺼리가 많이 생겼다. 과외를 해도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받았고, 학원강사도 해봤고, 그리고 나를 제일 즐겁게 했던 가끔 있는 지방 강연회도 있었다. 메니지먼트회사를 통해서 지방으로 내려가면, 그 동내 교육청에서 접대를 한다. 그리고 그 동내 고3수험생이나, 고등학생들을 체육관 같은데 모아놓고 강연회를 한다. 두번 정도 강연회를 하고 나면, 남은 시간에 그 동내 식도락이 시작된다. 짧은 주말을 그야말로 재미있고 알차고, 돈봉투 두둑하게 보낸다. 물론, 나에게 가장 큰 희열을 주는 일이 똘망똘만한 고등학생 후배들을 바라보면서, 그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그게 진짜 "좋은 것"이라고 믿었고 온몸을 다해 아이들이 이해하게 공감하게 이야기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강연회라 하면, 나는 강연원고를 갖고 있지는 않았고, 얼개만 짜서 많은 이야기를 즉흥적으로 생각해서 하는 편이였다. 그때 항상 첫번째 파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했던 얘기가 "", 마인드였다.

      내가 공부계획을 만들어서 시간 맞춰 공부를 하는 이유는, 특정부분 공부를 빼놓고 못할까봐가 아니라, 공부하는 그 외의 시간에는 비어있는 머리로 편하게 놀기 위해서였다. 공부를 임하는 자세 전에 미리 점검해봐야 할 것은, 고등학생이라는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생활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ᅳ    나는 즐거운가

      ᅳ    나는 활력 넘치는 편인가

      ᅳ    나는 누구에게 좋은 친구가 되주고 있는가

      ᅳ    친구와 부모와 그리고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ᅳ    나는 긍정적인가

      ᅳ    나는 투덜이인가, 내가 싫다고 하는 일들을 내가 하고 있는가...

      고등학생이었던 그 시기의 ""이란 대부분 뚜렷한 쉬운 목표를 가지고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고있는 시간을 듯 하지만, 어떤 막연한 목표나 어떤 막연한 미래를 위한 "인고(忍苦)"의 시기는 아니고 또한 그래서는 안된다. 오늘이 나의 인생의 전부이고, 오늘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된들 행복한 법을 알꺼라는 기대를 어찌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일탈이며 어떤 것이 사고이고 어떤 것이 모범적인가. 젊음이란 그 어떤 사건사고 속에서도 다시 딛고 일어날 시간과 기회를 가졌다는 뜻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초심, 감사, 배려. 아이에서 어른으로 되가면서 학교라는 나의 사회생활을 가지면서, 그 구성원으로서의 자세를 만들려고, 나름 나는 늘 애썼다.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고맙게 먹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기억 속의 우리 엄마는 여름 겨울 없이, 4시반에 일어나셨다따뜻한 물이 안나오던 시절에는밥 짓고, 국 끓이고 세면용 따뜻한 물 끓여놓으시고 가족들이 일어나면 집이 춥게 느껴지지 않도록 불도 다 때놓으신다. 시내로 이사하고 나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4시반에 일어나셨고, 정원 가꾸고 과일나무 손보는 일까지 다 마무리하셨다. 물론, 그때는 엄마의 그런 "노동"은 우리 집에 "엄마"라는 구성원으로서 너무나 당연한거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6학년 때, 동내 초등학교들이 통일고사를 보고 랭킹을 매기게 되면서 선생님들의 의욕이 불타기 시작하셨고, 어린 애기들을 5시반까지 등교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때 나는 11살이었고, 우리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먼 읍내여서, 더더욱 일찍 일어나야만 가능했다. 엄마는 나를 정확하게 4시반에 깨우시고, 계란후라이를 세개나 해주셨다(내가 워낙 좋아해서^^). 씻겨서 따뜻하게 입혀서 5시에 학교로 보냈다. 졸린 눈을 꼬집으며 등교하느라, 다른 별 생각 없는 고달픈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빠가 그러신다. 니네 엄마 4시에 일어나서 너 먹을꺼랑 다 준비해놓고, 너 옆에서 시계 들고 앉아 4시반까지 기다리고 있더라. 1분이라도 더 재우려고. 어린 나이게 "가족"에게 첨으로 "감동"이라는 것을 느꼈다.

    우리 엄마는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라는 래파토리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신다. 해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줘서 언제나 감사하다고 하신다.

      세상 살면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과 그 사랑에 대한 감사를 알고 지낸다는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이 되는지를, 요즘 들어 더더욱 알게 된다.

      12살때 중학교에 가면서 엄마와 떨어졌고, 엄마와 떨어진 처음 3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밤새 울었다. 아직도 그 그리움에서 헤쳐나올 길은 없지만, 그렇게 "고마운" 엄마 곁을 떠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손길의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요즘에야 세삼 느끼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마냥 나를 즐겁게 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사촌들, 그 외에 명절에 쓰나미처럼 3~40명 몰려드는 친척들. 이 모든건 엄마의 "시집살이"를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유난스러운 우리 가족들과 오랜 시간 같이 하시면서, 엄마는 서러운 것도 많으셨고 힘드신 시간도 더 많으셨겠지만, 엄마에게 어떤 ""을 했던 사람에게도 함부러 하지 않으셨고, 모든 사람이 칭찬하는 참하고 현명한 며느리셨다.

      누가 나에게 못된 짓을 했다고 해서, 내가 못된 사람이 되도 된다는 핑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온몸으로 배려하고 노력하고 인생을 살면서 사랑 받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나와 시간을 함게 하는 친구, 선생님의 구석구석이, 가끔 나에게 친절하고 가끔 나에게 가혹할 수도 있는 그런 것들이 고맙고 이해되고 나 또한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어지면서, 기숙사생활에 친구와 선생님이 전부였던 중고등학교생활에 빛과 희망이, 사랑과 행복이 그렇게 늘 있었던 것 같다.

      오늘 회사의 어떤 윗분께서 그러신다.

      니가 지금 이렇게 인정받고 있는 것은 너의 노력 그런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두뇌와 personality 때문이라고.

      두뇌는 이해를 조금 더 빨리 하고 기억을 조금 더 빨리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그리고 그 데이터들을 수시로 잘 꺼내서 조합할 수 있게 한다면, personality는 즐겁게 행복하게 도움 주고 도움 받으며 이해하고 이해 받으며 인간답게 하지 않을까.

      우리 엄마는 이렇게 나를 수재로 만드셨다. 스스로 감히 수재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를 나는 참 좋아하기 때문이다. 꿈이 있고 꿈을 쫓고 행복하고. 감사와 연민을 아는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또한 나의 영원 불변의 꿈이기도 하다.

    늘 감사하다. 온몸으로 personality를 물려주신 그 인격과 노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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